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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마눌 여행기(스크랩)

[스크랩] 강영미와 함께 떠나는 길따라 마음따라 8 - 불우했던 천재가 살았던 집, <추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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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추사고택>앞에 서자,

추사선생이 평생을 고수했던 그의 서화관(書畵觀) -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는 표현과

딱 맞아 떨어지는 고졸한 집이 한 채 기다리고 있다.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참으로 아는 이도 없다’고

유홍준 선생이 <완당평전>의 서문에서 했던 말이 가슴을 친다.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였고,

고증학자, 훈고학자, 역사학자, 지리학자, 천문학자,

시인, 실학자이며 당대에서 고금의 모든 서체를 두루 섭렵한 끝에

가장 독창적인 서체 추사체를 완성한

천재 서예가였던 그를 누가 제대로 평가할 수 있으랴!

 

 

원춘(추사선생의 아명)은 24개월 만에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나기 전에 집안의 우물이 다 마르고,

뒷산의 초목들이 다 시들었다가,

원춘이 태어나자 우물이 다시 솟아나고,

초목들이 모두 생기를 되찾았다고 하니

그의 천재성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없었던 큰집의 양자로 들어간 첫 해 입춘날,

양부가 된 큰아버지께서 월성위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입춘첩을 써 붙이라고 해서 여섯 살의 나이에 쓴 입춘첩을

당대의 재상 채제공이 보고

그의 천재성과 파란만장할 앞날을 예견했다고 하니,

불우한 삶이 곁들이지 않은 천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시대적으로 정조임금이 돌아가시고

어린 순조가 허수아비 왕이 된 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 나라의 역사가

백 년 이상 후퇴했다고 하는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를 살아갔으니

어찌 그의 인생이 파란만장하지 않았겠는가!

 

 

큰집의 양자로 들어간 그의 삶은

곧바로 이어지는 양아버지의 죽음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맞게 되고,

열두 살 어린 나이로 양어머니와 단 둘이

월성위궁에 남겨지는 것으로 외롭고 치열하게 펼쳐진다.

 

평생 두 번이나 맞이한 아내들이 차례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자식 하나 얻지 못하여 큰아버지처럼 다시 양자를 들였고,

자신을 평생 그림자처럼 보필했던 첩실에게서

겨우 아들 하나를 얻었던 추사선생~!

34살 늦은 나이에 출사를 하였으나,

55세의 노구를 이끌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8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와 겨우 몸을 추스르기 무섭게

다시 춥고도 거친 함경도 북청 땅에서의 2년의 유배.

 

 

추사가 태어나서 원춘 도령으로 살았던 집이 바로 <추사고택>이다.

한양으로 올라가서 시작된 외롭고 힘든 종손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친부모 슬하에 아우들과 뛰어놀고

집안 사찰인 화암사의 스님들께 불법도 배우고 경전공부도 하면서

아이답게 할머니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마음껏 뛰어놀았던 어린 날의 천국이 바로 이 집이다.

 

사랑채 마당에는 매실이랑 살구가 익어가고,

아기 주먹만한 모과가 열리고,

안채 마당에는 모란이랑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고,

안채 옆의 쪽문으로 통하는 우물곁에는

앵두가 다닥다닥 붙어서 빨갛게 익어가는 곳,

추사가 평생 그리워하면서도 마음대로 올 수 없었던 곳,

죽기 직전 초의선사에게 보냈던 마지막 편지에

비로소 풀어놓은 다 삭아서 비어버린 그리움 한 자락~!

 

 

푸른 우듬지를 하늘로 쳐든

 나무의 뜻을

천축국의 왕자가

나무(南無)라고 읽었는데, 나는

아무(我無)라고 바꾸어 소리 낸다

나무,

그 이르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태허(太虛), 그 푸르른 내 고향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남은 생을 마무리하고 있던 그에게

최후의 역작을 완성할 기회가 온다.

가까이 있는 봉은사의 스님이

절에서 15년간 판각한 경전을 보관할 전각을 지었는데,

그 전각에 붙일 현판을 하나 써 달라는 요청이었다.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를 닳아 없앴고,

천 개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어 완성된

추사체의 절정은 판전(板殿)이란 서툴고 고아한 글씨로 남기고

사흘 뒤, 추사는 태허의 푸르른 허공으로 돌아갔다.

 

추사선생이 친아버지를 따라 연경에 연행을 다녀오면서 가져왔다는

백송의 후손들을 곳곳에 심어 두었더군요~~

 

잔뿌리가 거의 없어 옮겨 심기도 어렵고

옮겨 와도 살아나기가 어렵다는 백송을

추사고택 부근에 백송공원을 조성하면서

잘 가꾸어 번식도 많이 시켜 두었답니다.

 

나무의 수피가 하얗고

잎이 세 개씩 모여나는 특징이 있는 것 말고는

우리나라에 있는 소나무랑 별로 다른 것은 없답니다.

 

이번 글은 인터넷 신문에는 올리지 않아 링크는 못 합니다.

가끔 가다 기사가 많은 날은 연재글을 

돌아가면서 한번씩 빼 먹더군요~~ㅎㅎ

흐리긴 해도, 편한 하루 되세요~!^^ 

출처 : ★부산 맛집기행 시즌2★
글쓴이 : 가얏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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