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목), 4일차인가?
앙코르와트은 하루만 보기에는 너무 엄청난 규모이다.
4~5년 전 이곳은 일본인의 관광으로 유명했고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엄청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많이 보는 것을 좋아한다나,
그래서 한 곳을 자세히 보기 보다는 여러 곳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유럽 사라은 여기서만 4박 5일을 보고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여하튼 대단한 곳이고 꼭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호텔 아침은 늘 그렇듯이 뷔페식이다.
간단히 먹고 서바라이 호수로 간다.
9시 10분 소음이 엄청난 조그만 발동선을 타고 간다.
배 바닥에 물이 올라오고 있는데도 주인은 “NO, Problem"이란다. 흐흐
‘바라이’라는 뜻이 저수지라는 뜻이니 그냥 서바라이라고 해야겠다.
‘메본 사원’을 보러 가기 위해 그 무시무시한 배를 타고 왔다.
메본 사원은 일부 담벼락만 남아 있다.
섬에 도착하자 말자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아리랑이 연주된다.
거의 장애우들이다. 전쟁의 아픈 역사의 피해자들이다.
여기서도 많은 아이들이 거리 행상을 한다.
누가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학교종, 송아지, 아리랑 등의 노래를 합창으로 잘도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는 까닭이겠지만,
“사장님, 멋져요”, “사모님, 이쁘요”, “머리 조심하세요”라곤 하곤
1달러 내지는 천원을 요구한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6.25전쟁 때 미군들을 따라다니며
“깁미 쵸코렛”을 외쳐댔을 우리 전쟁 고아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조금은 서글프다.
아이는 그래도 지구 어디서나 너무 이뿌게 생겼다.
우리 배를 타고 나오는 오누이에게 과자를 주니 동생에게 먼저 준다.
자기도 먹고 싶었을 텐데...
(그들이 만든 소품들..., 물론 이것 말고는 3~8개 1달러인 그 유명한 팔찌이다)
이제 캄보디아의 좀더 어두운 역사를 보러 가자
킬링필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와트마이 사원이다.
플포트(1975~79) 집권 당시 죽은 무고한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 둔 곳이다.
다 모을 수가 없단다. 너무 많기에~~~
와트마이 사원 옆에 “다르마 스쿨‘이란 일본이 지어주었고
지금은 스님들이 운영하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교사가 없어 당분간 휴교 중이란다.
우리말을 제법하는 그곳에 있는 선생님 한 분의 소망은
우리나라에 유학하는 것이란다.
우리 일행들은 조금씩 호주머니를 털어 100불 정도 기부하고 왔다.
캄보디아도 빨리 아픈 역사를 잊고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교육일 것 같았다.
지뢰 박물관으로 향한다.
왕코르와트 가는 길의 오른쪽으로 비포장 길이다.
이곳 차량의 30%가량은 번호판이 없다.
따라서 사고가 나면 오로지 경찰의 판단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물론 그 경찰이 공정하리란 보장도 없다.
물론 돈이면 거의 해결된다고 가이드가 말을 한다.
권력이 강하면 그만큼의 비리가 따르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변의 법칙인 모양~
이 못 사는 나라에서 무신 비리가~~~~
현재 전 세계 지뢰의 2/3가 캄보디아에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휴전선에 얼마나....?
그냥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도 지뢰밭이다.
서북부인 이곳 시엠립 지역은 지뢰만이 문제이지만
미군이 융단폭격을 한 동부지역에는 불발탄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하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
11시 10분!
도착한 박물관 앞에서 팔이나 다리가 하나 없는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다.
아! 이게 캄보디아의 현실이구나.
앙코르와트 유적지 도처에 팔, 다리가 잘린 사람들이
관광객들에 구걸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지뢰가 주는 아픔을 실감한다.
플포트 시기에 입었던 그 군복을 입고 예쁜 소녀가 여전사처럼 입구에 있다.
지금은 많이 컸지 싶은데....
안으로 들어가니 그리 넓지 않은 면적에 여러 가지 종류의 지뢰를 전시해 놓았다.
박물관이라기보다는 허름한 시골집을 연상시키는 그곳에는
그가 직접 그린 그림과 그곳에서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인 어린이들의 사진이 걸려있고,
각종 폭탄들도 많이도 수집하여 전시해 놓았다.
2층 간이 숙박시설은 자원봉사하는 서양인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우리가 찾았을 때도 몇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관람객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들은 또 여행이 끝날 무렵
남아 있는 의약품이나 옷가지, 문구용품 등을 이곳에 기증하고 떠난다고 한다.
아키라(일본인 이름 같지만 캄보디아인)는 그 물건들을 모아 시골 동네를 다니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 작고 허름한 지뢰박물관은 아키라의 꿈과
그 꿈을 돕는 각국의 자원봉사자들로 인해 웃음과 희망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마당에선 해먹에 누워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아이 같은 엄마의 모습이
그래도 평안하게 보인다.
11시 40분! 현지식으로 먹는 식당에 도착했다.
역시 주종은 쌀국수이다.
이젠 먹을 만했다. 아니 맛을 붙였다. ㅋㅋ
이젠 동남아시아 최대라는 <톤레샵 호수>로 향한다.
이곳은 건기와 우기가 확연히 그 영역이 달라진다.
가다보면 산이 겨우 하나 보이는데(캄보디아 최고 높이의 산) 고지 110m에 불과하단다.
우기가 되면 산 중턱이 선착장으로 변한단다.
이곳은 너무나 유명한 곳이라, 설명이....
세계 최악의 주거지, 최저 소득, 그러면서도 최고의 행복 지수를 가지고 있는 곳...
도대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 행복 지수와는 거리가 정말 먼 곳이다.
그러나 먹을 것은 호수가 해결해 준다.
이제 모심기를 한다.
3모작도 가능하나 주로 1~2모작만 한다.
추수도 윗줄기만 자르고 그냥 방차한단다.
그러면서도 쌀이 자급자족이 안 된다고 하니~~~
남자들은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 총각 때는 열심히 돈을 모으나
결혼 후에는 거의 백수, 여자만 열심히 일한다나~
여하튼 우리의 사고로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생선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한다.
당구대를 놓고 놀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우리 배를 보조하는 아이는 10살도 채 안 되어 보인다.
그런데도 솜씨는 익숙하다.
배는 서서히 수상촌을 만난다.
T.V는 이제 많이 있다고 한다.
물은 완전히 흙빛인데 이 물은 1급수라고 한다.
침전시키면 깨끗해진다고 하나
그래도 사람들과 가축들의 배설물, 또 생활 오폐수가 다 이곳으로 그냥 배출되는데
1급수라니 믿기지 않는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해 안 되는 것이 어디 이것뿐이더냐?
평생을 이렇게 물 위에서만 생활하는 사람이 2만명이 된다고 한다.
캄보디아인 1200만명 중 120만이 이곳에서 먹을 것을 해결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대단한 호수임에는 틀림없다.
곳곳에 이런 전통적인 방법으로 고기를 잡는다.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많이 잡힌다고 한다.
(잡힌 고기들이다)
드디어 목적지인 수상 학교이다.
오기 전에 이곳에 주려고 학용품을 사고,
또 일행들에게 집에서 쓰지 않는 옷이랑 가방을 협조 받았다.
우리 애들 학원이나 유치원 가면 주는 손가방이 여기서는 당연 인기이다.
한글로 적힌 것을 최고로 친다니....
우리가 어릴 적 영어로 적힌 것을 최고로 칠 때와 별반 다르지 않나 생각하니 영 기분이...
애들은 예상대로 60명쯤 되는 학생 중 노트도 책도 없었다.
겨우 2~3명만이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음악, 체육, 미술 교과는 아예 없다고 한다.
우리가 사간 학용품 중에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도 제법 되는데,
혹이라도 그들에게 새로운 교과를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울집 애들 입지 않는 여름옷이랑, 옆집들에게 소문내어 간신히 구한 가방들이랑
받고 좋아하는 애들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짐이 되더라도 좀 더 가져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새침떼기같이 생긴 아이가 다른 애들처럼 먼저 받으려고 야단법석을 부리지 않고
제 자리를 끝내 지키고 있었던 자존심 센 아이의 초롱한 눈망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오늘도 여기에서 중단하입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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