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갠 아침,
물기 머금은 싱그러운 나뭇잎들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 호젓하면서도 푸근한 길 -
경주 남산을 걷고 싶어진다.
남산은 어디에나 있는 동네 뒷동산을 오르는 것처럼
부담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골짜기가
40개도 넘게 마을길과 이어져 있다.
골짜기가 많은 까닭인지 평일에 가면
어느 골짜기를 택하더라도 용장사지까지 가는 동안
사람 한두 명 만날 정도로 호젓하다.
비 갠 산길의 소쇄(瀟灑)함은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물기 머금은 흙길은 촉촉하니 먼지 없어 좋고,
빗물에 씻긴 신록들은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며,
버선코 같은 꽃잎을 막 펼쳐내는 아카시아 향기는
아득한 행복감을 안겨 준다.
통일전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서출지를 지나 칠불암 식당 곁의 골목길로 접어 들면
용장사지로 가는 가장 빠른 임도로 이어진다.
나무와 꽃들과 새들과 바람과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며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용장사지로 들어가는 팻말을 볼 수 있다.
용장사지 삼층석탑 곁에 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온다.
마주 보는 고위봉에서 흘러내리는
태봉능선과 이무기능선을 양대 산맥으로 해서
크고 작은 골짜기 사이로 수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봄빛의 파노라마를 어떤 화가가 그려낼 수 있을까?
커다란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을 돌며
탑돌이를 몇 번 한 뒤에 마주보고 서면,
거의 1,300년 세월을 견디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아득한 탑의 이력에
문득 하루살이 같은 존재성이 느껴져 나는 자꾸만 작아진다.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과거급제의 꿈을 접고
중(僧)도 속인(俗人)도 아닌 사람이 되어 떠돌던 김시습이
말년에 은거하여 최초의 한글소설<금오신화>를
집필했다는 곳이 바로 여기 용장사다.
겨우 다섯 살의 나이에 세종대왕 앞에서 한시를 지어올리고
‘신동’임을 인정받았던 그도
이 자리에서는 스스로를 다 내려놓았던 것일까?
다음 코스는 남산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처님을 만나러 간다.
남산 불곡(佛谷)에 자리 잡은 감실부처님이다.
상서장 앞의 주차장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좁은 샛길로 들어서서 한참을 가다보면,
꽃마차 끄는 말을 키우는 집이 보이고,
그 바로 앞의 소나무숲에 차를 세우면 된다.
정말 한적하고도 정겨운 산길을 100m 정도 올라가면
지금은 찾기도 쉽게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계단의 중간쯤에서 우측으로 빠지는 대숲으로 들어서면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닮은
푸근하고 편안한 상호의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제주에 가면 마을마다 하나씩
마을 사람들의 수호신처럼 존재하는 ‘본향당’에 모셔진
신의 모습처럼 친숙하게 앉아서,
누구라도 마음을 열고 가슴에 담아온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가게 만드는 그런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이 부처님 역시 이 자리에서
1,300년이 넘는 세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계셨을까...
유홍준 선생이 감실부처를 만났던 감흥을,
‘달 밝은 날 밤에 이 부처님 곁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나도 진하게 공감한다.
오는 여름날의 어느 달 밝은 밤에,
돌아가신지 오래되어 얼굴도 희미한 외할머니를 만난 듯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를 밤새 풀어놓는 날을 기약하면서
아쉬운 걸음을 돌린다.
차를 세워둔 소나무숲에서
걸어가도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옥룡암이 있다.
옥룡암의 산신각을 우측으로 올려다보면,
거기엔 정말로 경탄이 저절로 나오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있다.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이란 긴 이름을 지닌 유적지다.
거의 네모진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의 사면을 돌아가며
탑과 부처와 삼존불, 비천상, 가릉빈가, 천마, 사자상,
승려상, 보리수 아래 앉아 수행중인 부처상 등등...
30점이 넘는 여러 가지 모습을 동시에 새긴
보기 드문 조상군(彫像群)을 둘러보노라면,
볼 때마다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신라시대 남산은 하나의 불교성역지였다.
한반도의 격동기였던 7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통일을 위한 끝없는 전쟁이 이어지던 시기에,
신라 백성들은 이 조그만 남산 기슭에
300개가 넘는 사찰을 만들고 부처를 만들고
탑을 세우고 보살상을 조각하며
전쟁 없는 평화로운 불국토의 소망을 엮었으리라.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훼손되고 묻혀져
흔적도 없어진 유적들이 더 많겠지만,
지금도 남산은 바위마다 부처가 웃고 있고
골짜기마다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현존하는 불국토다.
남산의 수많은 부처상들을 다 만나는 일은
남산에 살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인 까닭에,
나는 오늘 내가 좋아하는 부처님들만 만나고 돌아온다.
해가 설핏 저무는 시간,
마지막으로 남산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꽃미남 부처님 <보리사>의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러 간다.
보리사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동
쪽의 감포 앞바다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계시는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보리사의 뜨락은
온갖 봄꽃들이 만발하여 그야말로 극락세계로 가는 길목 같다.
뭐가 그리도 바쁜지, 연재를 계속 올려드리지 못했네요~~ㅎㅎ
사진을 몇 장 보냈는데도
이번에는 신문의 공간이 부족했는지
사진도 없이 본문만 올랐답니다~~
인터넷 신문 링크 걸어두었어요~~
싱그러운 봄날 하루, 모두들 행복하시구요~!^^
http://www.leaders.kr/news/articleView.html?idxno=2275
'★가족★ > 마눌 여행기(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강영미와 함께 떠나는 길따라 마음따라 9 - 불가사의한 미소 <서산마애불>과 고졸한 <개심사> (0) | 2014.08.01 |
---|---|
[스크랩] 강영미와 함께 떠나는 길따라 마음따라 8 - 불우했던 천재가 살았던 집, <추사고택> (0) | 2014.08.01 |
[스크랩] 강영미와 함께 떠나는 길따라 마음따라 7 - 비운의 <건봉사>, 그리고 화진포의 일몰 (0) | 2014.08.01 |
[스크랩] 강영미와 함께 떠나는 길따라 마음따라 6 - 시간이 멈춘 북방식 전통마을 <왕곡마을> (0) | 2014.08.01 |
[스크랩] 강영미와 함께 떠나는 길따라 마음따라 5 - 별보다 많은 야생화의 천국 <곰배령> (0) | 2014.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