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토요일 여행 7일째
아침 6시 30분 로비에 모여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타즈마할을 향해 출발했다.
타즈마할로 들어서는 먼 입구에서부터
일제히 버스에서 내려 밧데리 차로 바꿔탔다.
매연으로 인해 흰대리석으로 된 타즈마할의 아름다움이
손상될 것을 염려한 배려라고 하지만,
길가엔 온통 오물이 널부러져 있으면서...참~!
타즈마할 입구에 도착하니 7시경~!
이렇게도 경비가 삼엄한 곳에서
남,녀 줄을 따로 서서 온몸을 수색당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물체는 모두 압수했다.
특히 여자들 가방 안에 뽀족한 물건들
손톱 가위나, 작은 송곳 따위는 여지없이 압수다.
묘당 안의 보석들을 파 가는 기구로 쓸까봐 그렇단다.
입구의 검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시간에
저 멀리로 아침 일출이 흐릿하게 보인다.
안개 자욱한 아침이었다.
타즈마할로 들어서는 1차 관문을 통과하면
이렇게 긴 통로를 한참 걸어가야 2차 관문에 이른다
불규칙하게 뻗은 산업 도시 아그라는
델리에서 204Km 떨어진 곳에 자리하며
무굴 제국의 수도였다.
무굴 제국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져 갔으나
지금까지 아그라의 명망을 유지시킨 것은 바로 타즈마할 때문이었다.
타즈마할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2차 관문인 외곽 성문이다.
성문을 통과해 ‘ㄱ’자로 꺾여 들어가야 타즈마할은 보인다.
철옹성처럼 견고하게 보존된 타즈마할~!
‘마할’이란 힌두어로 ‘성’이란 뜻이지만
타즈마할은 성이 아니라 무덤이다.
무굴 제국의 5대 황제 샤쟈한의 왕비
뭄 타즈의 시신을 안치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다.
타즈마할 뒤쪽으로는 야무나 강이 흐르고 있고
높은 축대로 쌓여진 강쪽을 제외하고 나머지 삼면은
모두 높은 담으로 둘러져 있다.
최종 관문인 붉은 사암으로 된 이 문에는
삼면에 아랍어로 된 코란의 문구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오~! 마침내 저 멀리 자욱한 안개 가운데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그 아름다운 건물이 우뚝 눈에 들어온다.
자~! 그러면 이제 샤자한과 뭄타즈 왕비의
전설적 사랑 이야기를 풀어보자.
샤자한의 나이 16살 되던 해 왕실의 시장에서
한 살 연하의 여인 뭄타즈 마할(처녀적 이름은 아르주만드)을 만나게 된다.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당시의 묘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고 4년을 보낸다.
이 사이에 샤자한은 페르시아의 공주를 정비로 맞아들이게 되지만
결국 뭄 타즈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 4년 후인 1612년
뭄 타즈마할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그녀에 대한 샤자한의 사랑은
참으로 불 같은 것이었다.
19년의 결혼 생활 동안에 14명의 아이를 낳았으니...
아마도 뭄 타즈는 거의 매년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것이
그녀의 일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14번째 아이를 낳고 뭄 타즈는 심각한 병을 얻어
자신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1631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샤자한의 슬픔은 너무도 깊어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백발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632년부터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장 22년엔 걸친 거대한 분묘 프로젝트인 타즈마할 조성에 들어갔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지었다.)
페르시아의 건축기사를 불러 들여 설계를 맡기고
건축 자재도 적사암, 터키옥, 사파이어, 자수정, 산호, 비취, 공작석, 등
진귀한 자재를 러시아 아라비아 중국 등지에서 사들였고,
사방 95m의 정사각형 초석으로부터 56미터 높이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흰 대리석인 돔(dome)양식의 건축을 매일 이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지었다.
이 묘궁은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첨탑)처럼 네 귀퉁이에 높은 광탑이 세워져
이슬람 사원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묘당 안으로는 카메라 소지하고 들어갈 수가 없어
더 이상은 촬영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할 수 없었다.
이 공사에 동원된 기술자들은
후에 타즈마할이 완공된 후에 모두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고 한다.
꼭 같이 아름다운 건축물이 재생산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그래도 무덤을 만든 모든 이들을 죽여서 묻어버렸다는
진시황제보다는 인간적이었을까? ㅎㅎ
묘당 안에 들어가면 안내원이 손전등을 이용해
대리석 내면으로 불빛을 비추어주는데, 그 순간에
상감 기법으로 새겨진 온갖 보석 꽃문양이
살아서 움직이듯 생동감 있게 공간감을 유지하며 투명하게 비치는 게
저절로 감탄사를 유발하게 했다.
오~오~! 타즈마할 묘당의 아름다움이여~!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번 가 보시라~!
흰대리석에 박힌 찬란하고 다채로운
꽃과 식물들은 온갖 보석들을 상감 기법으로 파서 일일이 새겨 넣은 것이라 하니
참으로 22년의 세월이 족히 걸리고도 남았을 법하다.
건축광이란 별명이 붙었던 샤자한 황제는
이 호화 묘당 뿐만 아니라, 수도를 델리로 옮기려는 계획하에
델리의 레드 포트(Red fort)등과 같은 엄청난 공사들을
계속적으로 추진시키면서 국가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국고를 탕진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마침내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축출 당하기에 이른다.
타즈마할의 아름다움은 일출, 일몰, 달밤, 안개 자욱한 날...등
각기 아름다운 모습이 색달라 가능하면 여러 번 그 신비한 모습을
감상하고 오라고들 하지만, 입장료가 만만치 않다.
현지인들은 20루피, 외국 관광객은 자그마치 750루피
(당시 시세는 1$가 약 42루피)
외국인에게 해도해도 너무한 입장료를 받는다.
이런 면에서 보면, 샤자한 황제는
살아서는 국고를 탕진해 아들에게 축출당하는 수모를 받았지만
죽어서는 영원히 가난한 인도의 국고를 충당해주는 애국자인 셈이다.
참으로 백색 대리석의 아름다움은
만들 때나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간직되고 있었다.
세계의 무수한 대단한 시인들이 참배하면서도
한 편의 시로는 표현하기 힘든 완벽하고도 거대한 아름다움을 지닌 타즈마할~!
사방 정사각형의 위치에 정확하게 위치한 이 탑들도
예전에는 개방해서 사람이 위로 올라가 사방을 돌아볼 수 있었건만
카스트 제도를 넘어서서 사랑하게 된 어느 연인이
이 탑 위에 올랐다가 함께 떨어져 동반 자살을 감행하면서
지금은 문을 닫아 버려 안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첨탑 형식 자체는 회교(이슬람) 양식이지만
여기 보이는 처마 기둥 양식은 힌두 양식이라고 한다.
타즈마할 좌, 우로 이렇게 생긴 건물이 딱 버티고 있는데
우측은 회교 사원이며, 좌측(사진)은 영빈관으로 지었다.
착시 현상을 주어, 두 면으로 된 벽이
네 면으로 보이게 해주는 무늬를 귀퉁이마다 그려 놓았다.
자욱한 아침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는 야무나 강 저 너머로
샤자한 황제가 검은 대리석으로 자신의 묘당을 만들려고 했던 터가 보인다.
두 묘당을 구름다리로 연결하여, 죽어서도 마주보며 손 잡고 있고 싶었던
한 사나이의 사랑의 열정은, 아니 거의 광적인 집착은
아들의 반란으로 이루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대단한 사랑만큼은
가슴 찡한 감동으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다가왔다.
인도는 안개의 나라일까?
우리는 가는 곳마다 아침엔 자욱한 안개와 함께 했던 기억만 남는다.
점심 먹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오후엔 아그라 성으로 들어갔다.
1566년 완성된 성으로, 3대 황제 악바르에 의해 시작하고
샤자한에 의해 마무리 된 무굴 제국의 대표적인 성으로
처음엔 군사적 목적으로 견고하게 건설하였으나
샤자한 치세 동안엔 궁으로 사용되었고,
아우랑제브가 왕이 되면서, 샤자한의 유폐 공간이 되었다.
샤자한의 셋째 왕자 아우랑제브는
오랫동안 데칸 지방의 전선에서 무굴 왕조를 지키기 위해 전투를 거듭했으나
부왕이 국고를 탕진해 국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위로 두 형을 죽이고
부왕 샤자한을 감금한 뒤 왕위에 올랐다.
샤자한 자신이 반란을 일으켜 부왕을 몰아내었듯이
자신 또한 아들에 의해 축출당하는 신세가 된 것을 보면서
인과의 고리는 참으로 어쩔 수 없음을 실감했다.
샤자한은 여기 이 팔각탑에 유폐 당해서(1658)
저 멀리로 보이는 타즈마할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1666년 마침내 죽어서야 뭄 타즈 곁에 나란히 눕혀진다.
아그라성 내부도 타즈마할처럼 호화롭고 섬세한 무늬들을
일일이 상감 기법으로 새겨넣었다.
천정 쪽에 제비를 닮은 새가 한 마리 둥지를 틀고...
궁궐 입구는 여전히 흰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궁궐 내부의 조그만 분수대 겸 목욕탕
벽 쪽의 물결 무늬를 따라 물이 흘러내려오게 장치함.
궁궐 내부의 문양이 이렇게 화려하기는 했으나
타즈마할에 비길 바는 아니었다.
구석구석 빈틈없는 섬세한 문양과 조각들
한때는 찬란하게 빛났고, 영원히 존속할 것 같았던 문명들이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연의 질서를 위반한 인간의 교만이
반드시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찬탄의 대상이 되고
경외심마저 품게 되는 이러한 세계적인 유물들도
사실은 한 사람이나, 몇 사람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무지막지한 인권 유린과 엄청난 자연 파괴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밋이나, 중국의 만리장성, 진시황제의 무덤,
페루의 마추픽추나,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지 등...
세계적인 모든 유적들의 이면에는
엄청난 인력의 동원과, 그들의 희생과 죽음을 딛고
세상 사람들의 찬탄을 받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 중에 누구라도
이러한 건축물을 만드는 희생양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멀리 아스라한 안개 사이로
희미한 타즈마할을 바라보며, 잠시 무거운 마음을 느꼈다.
극단적 아름다움과 극단적 고통은 항상 짝이 된다는 이 역사적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