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퍼진라맹 글 : 옆지기
1월 2일 아침, 여행 9일째 마지막날입니다.
이스탄불의 아침~!
마침내 이스탄불에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정복되었을 때는 '비잔티움'이라 불렸고
325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복하고는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했으며
1453년 마침내 오스만투르크에 점령되면서
'이스탄불'이란 이름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는
2,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오래된 고대 도시입니다.
그러나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수도는 '앙카라'로 이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스탄불은 터키 최대의 무역, 문화, 관광의 도시입니다.
이스탄불을 제대로 볼려면
길게는 일주일, 짧게라도 2박 3일은 봐야하지만
두바이를 거쳐오는 바람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오늘 하루입니다.
구시가지쪽의 골든 혼(Golden Horn) 입구에 있는 '에미노뉴' 부두에서
보스프러스 크루즈를 위해 7시 40분 배를 탑니다.
이스탄불은 보스프러스 해협을 기준으로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뉘어집니다.
유럽쪽은 다시 골든 혼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쪽을 '구시가지'라 하여 긴 세월 무역과 상업의 중심이 되었으며
고대로부터 수도의 역할을 했던 까닭에
궁전과 유적지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스탄불 여행의 핵심적인 곳입니다.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고 하네요.
신시가지는 '탁심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우리는 바쁜 일정으로 이곳에 들러지도 못했습니다.
모두들 거의 새벽 1시가 넘어 잠들고
새벽 5시 안 되어 눈을 뜨니 너무 피곤해 눈꺼풀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어제는 새벽부터 밤까지 너무 심한 강행군을 했었고
12시를 넘기고 방 배정 받아 들어와서는
샤워하고 그 새벽에 하나 남은 컵라면을 아끼면서
둘이 나눠 먹고 잠이 들었으니 더욱 눈이 떨어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겨우 정신차려 세면장으로 가는데...오~마이~갓~!
엄청난 폭우가 퍼붓는 새벽입니다.
천둥에 번개를 동반한 폭우~!
아침 식사하고 짐을 챙겨 7시경 나옵니다.
아침 일찍 '보스프러스 해협'을 왕복하려고
단독 전세선을 예약해 두었는데, 일정이 오늘도 너무나 빠듯해서
궁전이나 사원이 문을 열기 전에 해협 왕복부터 해 볼 여정입니다.
신기하게도 호텔을 나서자 거짓말처럼 비가 개이네요.
종일을 비와 숨바꼭질하면서 다닌 날입니다.
비는 개였지만, 항구에는 바람이 엄청 거세게 불었습니다.
'보스프러스 해협'은 흑해에서 마라마라해까지 길이 약 30Km의 좁은 바다를 말합니다.
너비는 660 ~ 3000m인데, 이 해협을 기준으로 우측은 아시아, 좌측은 유럽이라고 나누지요.
그리스 신화에 보면
제우스가 님프인 '이오'에게 사랑을 느낀 것을 눈치 챈 헤라가 질투를 하자
제우스는 '이오'를 암소의 모습으로 바꾸어 헤라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우스가 그 소를 자꾸 데려가려 하자
화가 난 헤라는 벌레를 암소 등에 붙여 이오를 괴롭힙니다.
참다 못한 이오가 도망쳐서 보스프러스를 건너갔다고 하네요.
그리스어로 '보스프러스'는 '암소가 건너다'란 뜻이니 이 신화에서 유래된 명칭입니다.
보스프러스를 좌측에서 출발해 우측으로 돌아내려 옵니다.
좌측에는 호화스런 궁전과 귀족들의 별장과 견고한 요새와
유럽풍의 우아한 저택들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인류 문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
극찬했다는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따라
우리는 배를 타고 보스프러스를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유럽쪽에서 아시아를 정복하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했고
아시아에서도 유럽땅을 밟으려면 거치지 않을 수가 없으니
긴 세월 아시아와 유럽의 야욕적 각축장이 되었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모자이크 되어 나타난
특이한 문화의 도시로 핵심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이스탄불이 치러야했던 무수한 고난과 희생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결은 유유히도 흘러가며
긴 세월의 혼란과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출렁입니다.
터키의 베르사이유라 불리는 궁전~!
해협의 서쪽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입니다.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는데 1814년 화재로 소실되고
1856년에 재탄생한 격조있는 석조 궁전인데요
다 둘러보려면 2시간이 넘게 걸린다기에 우리는 그저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겉모습만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바다를 메워 간척한 땅에 세웠는데
지나치게 초호화판으로 건립하는 바람에
왕실의 재정을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답니다.
바깥에는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며 창을 두드립니다.
모처럼 여인네들끼리 차 한 잔을 주문시켜 두고
수다방을 열었습니다.
워낙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며 다니느라고
서로 마주 앉아 소박한 담소를 나눌 시간도 없었습니다.
아마 여행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 함께 나눈 시간이지 싶네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터키 방문시에 묵었다는
'츠라얀 팔라스'호텔도 지나갑니다.
궁전을 개조하여 지금은 호텔로 국빈급의 내빈들에게 제공된다고 하네요.
웅장하고 나름대로 격조가 있어 보입니다.
보스프러스를 따라 형성된 지역 중에서 가장 활기찬 곳이라고 하는
오르타쿄이 사원 앞을 지나갑니다.
젊은이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인만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값싼 수제 악세서리들을 살 수 있는 곳이라네요.
이 조그만 지역 안에 사원을 비롯한
유대교 성당, 그리스 정교회, 등이 공존하고 있어
여러가지 종교가 관대하게 받아들여진 곳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탄 작은 크루즈선이 지나가는 흔적만으로도
제법 높은 물결이 출렁이며 파동을 일으키는 이 해협은
그래도 여태 해일이나 태풍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베네치아를 연상시키는 물과 바로 붙은 것 같은 건물들도
아무런 문제없이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 해협의 물들은 양 방향으로 아주 급물살을 이루며 흐르는데
마라마라해에서 흑해 쪽으로의 바닷물은 표면으로 흐르고
흑해에서 마라마라해 쪽으로는 수심 40m 깊이의 심층으로 흘러
표면과 내면의 염도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오늘처럼 바람이 많이 부는 악천후에는
물의 흐름이 시속 8~9Km 정도라고 하니 이런 물결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흑해 쪽에서 에게해를 거쳐 대양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배들은
반드시 이 보스프러스 해협을 통과해야 하기에
한 해에 여기를 통과하는 배는 무려 5만 척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국기에 '태극기'란 이름이 있듯이
터키 국기는 ‘달과 별’이라는 뜻의 ‘아이 일디즈(ay yildiz)’라는 애칭으로 부릅니다.
BC 4세기 마케토니아의 군세(軍勢)가
비잔티움의 성벽 밑을 뚫고 침입하려 했을 때
초승달 빛으로 이를 발견하여 나라를 구하였다는 전설을 그리고 있다고도 하고,
그밖에 1398년의 코소보전투가 끝난 후
피바다 속에 나타난 신비로운 달과 별을 가리킨다는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또한 별은 금성(金星)을 의미하며
달과 별이 함께 어울린 모양은 선(善)과 행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유럽쪽으로 올라가는 해안은 대체로
귀족적인 별장과 앞에 세워둔 요트들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다채로운 별장의 전시장 같기도 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지요.
유럽풍의 분위기도 물씬 풍겼습니다.
해협의 중간쯤에서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는
"루멜리 히사르'입니다.
1452년 메흐멧 2세는 콘스탄을 정복하기 위해
불과 4개월 만에 이 요새를 완성합니다.
그리고 맞은편에 위치하는 '아나돌루 히사르'와의 협공으로
흑해에서 콘스탄으로 공급되는 모든 원조선을 격파하여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점령하게 됩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으며
여름에는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하고
밤이면 화려한 조명을 밝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합니다.
해협의 폭으로 가장 좁은(660m) 이 두 요새 사이로
우리의 크루즈선은 유턴을 해서 다시 아시아쪽으로 내려 갑니다.
아시아쪽의 풍광이 펼쳐집니다.
터키는 국토 면적은 우리 나라의 8배 정도인데
인구는 7천만에 불과합니다.
그 중 1,500만의 인구가 이스탄불에 모여 산다고 하니
서울에 못지 않은 인구 과밀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또한 터키의 부자들은 모두 이 해협에 별장을 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해협은 양 해안은 모두 세계적인 별장의 전시장 같습니다.
맞은편의 '아나돌루 히사르'입니다.
저택 앞에 매어둔 요트들도 그 모양이 다양합니다.
터키 전체의 국민 소득에 비해
이스탄불의 국민 소득이 2배라고 하니
과연 상업, 무역의 중심 도시라 할 만합니다.
콘스탄을 함락시킨 메흐멧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파티히 술탄 메흐멧' 다리입니다.
따라서 이 다리는 아시아에서 유럽쪽으로는 무료이고
그 반대로는 돈을 받는다고 하네요.ㅎㅎㅎ
터키의 색인 푸른색으로 지붕을 만들고
전면엔 모두 유리창을 배치한 이 정갈하면서 품위있는 별장은
터키 최고의 부호 소유라고 합니다.
여름 궁전이란 별칭을 가진 베이레르베이(총사령관)궁전입니다.
1865년 압둘 아지즈 왕이 유럽의 궁전을 본 따
우아한 대리석으로 지은 궁전인데요,
여름 별궁이나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왕좌를 버린 사랑으로 유명한
영국의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도 이곳에 묵어 갔다고 합니다.
다시 돌마바흐체 궁전앞으로 와서
우리는 출발했던 부두에서 배를 내립니다.
9시 20분 경 - 거의 80분을 해협 사이를 구경하고 왔습니다.
배에서 내리자 작은 빗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부두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손으로 만든 듯한 조끼를 팔고 있었습니다.
양털과 가죽으로 만들어 예쁘게 보였는데
입을 만한 아이가 없어 가격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골든 혼'이 시작되는 갈라타 다리 위에서
고등어 낚시하는 사람들이 비옷을 입고도 열심입니다.
주로 고등어나 전갱이 종류를 잡아 고등어케밥을 해먹는다고 하네요.
이스탄블에서 고등어 케밥을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골든 혼'은 상하로 해협을 형성하고 있는
보스프러스의 중간쯤에서 다시 우측으로 약 7Km 들어간 해협
즉 유럽 쪽의 이스탄불을 다시 구시가와 신시가로 가름하는
아주 좁은 해협인데요.
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하자
로마의 국민들이 자신들이 가진 재산과 금붙이들을
오스만인들에게 약탈 당하지 않으려고
모두 자진해서 바다에 버렸는데, 해가 질 무렵이면
바다밑에서 반짝이는 금붙이들로 인해
온통 좁은 해협이 금빛으로 빛났다고 해서 붙여진 슬픈 이름입니다.
9시 30분경 우리는 성소피아 사원과 거의 맞붙어 있는
톱카프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궁전으로 걸어가는 길가의 모습들입니다.
야외 카페 같은데, 비가 오니 손님이 없습니다.
터키여행의 시작은 이스탄블에서 한다고 하지만
우리 일행은 거꾸로 더듬어와 여기서 여행을 마칩니다.
이스탄불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멧 사원)의 웅장한 모습을 보며
바로 곁에 자리한 톱카프(대포문)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궁전의 구조는 크게 네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정원으로 들어갑니다.
약 400여 년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
그 제국의 행정 중심지였던 이 궁전,
21만 평의 거대한 대지 위에 건설되었다는 톱카프 궁전~!
이스탄불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간다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오스만 제국의 24대 왕까지 상주했던 궁전이며
25대부터는 보스프러스 해협에 있던 '돌마바흐체'로 옮겨갔다고 하네요.
'톱카프'란 뜻이 '대포문'이라는데 여기 입구를 보면 이해가 되지요?
거대한 대포알 두 개 사이로 두번째 성문이 시작됩니다.
바부스 셀람(예절의 문)이라고도 합니다.
왼쪽 탑은 범죄를 저지른 관료들의 감방으로 사용되었답니다.
두번째 문을 통과하면
수백 년씩 묵은 큰나무들이 궁전의 내력을 말해주듯 우뚝합니다.
대제국의 위대한 경전답게 금으로 새긴 코란의 문구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거대한 영토 표시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처음으로 '마호멧'이란 이름과 코란을 들어본 것 같은데
그때 세계사 시간에 배운 내용 중에
아직도 웃음을 자아내는 기억이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많은 지역을 정복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아~!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는구나."
하고 아주 잔인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 인식했으며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을 이러한 인식에 갇혀 있었습니다.ㅎㅎㅎ
타종교에 대한 무지의 결과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슬람교에 대한 많은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발터 바이즈의 <이슬람교>등을 읽어보고 느낀
이슬람교도들의 그 포즈는 아마도
'마음 속의 모든 아집과 아상, 그리고 욕망에 대한 집착을
칼로 자르듯이 버린 다음에 종교의 세계에 입문하라.
또는 종교를 받아들이고 기도하라.'
라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있는데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궁궐 안의 큰 나무들의 거의가 향나무와 프라타너스 나무였습니다.
지금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이 궁궐의 내부가
예전 제국의 시대에는 온갖 꽃과 식물이 자라고
양과 공작새와 이국적인 동물들이 뛰어 다닌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꿈의 공간이었다고 하네요.
의회 건물로 쓰였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 뽀족한 탑은 '정의의 탑'이라 명했으며
감시의 기능뿐만 아니라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지침 기능을 했다고 하네요.
의회 건물 옆으로 '하렘'이란 궁녀들 숙소가 있었는데
온갖 종류의 젊은 궁녀들이 제각기 왕의 은총을 기다렸겠지요.
정복지에서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인들, 외국 사신에게 선물 받은 여인들,
노예 시장에서 사 온 예쁜 여인들...흑인, 백인, 황인종의 여인들이
최고 1,200명이 되었을 때도 있었답니다.
이 여인들을 이야기 하다 보니, 역시 터키의 복합 문화가
궁궐 안에서까지도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함께 했던 것이
상상만으로도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하렘'을 지키는 남자 환관들은 모두 흑인이었다고 하네요.
아이를 낳으면 바로 표가 나서 절대 다른 마음 먹지 못하게 한 장치겠지요.
궁전이었을 때, 여기가 주방이었답니다.
3,000명이 넘는 인원이 요리와 식품 저장과 분배 등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왕의 요리, 기타 다른 사람들의 요리하는 곳이 달랐고
음식 만드는 공간과 디저트 만드는 곳, 그리고 술이나
기타 접대 요리하는 곳이 달랐고
기타 부대 시설로 종사자들의 숙소, 사원, 목욕탕, 식품 저장고...
등이 모여 있던 곳이랍니다.
지금은 박물관의 전시장으로 역할을 합니다.
세번째 정원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에는 왕의 접견실이 있어 외국 사신들을 만났던 곳인데
이곳 접견실 앞에는 수도꼭지를 만들어
사신 접대시에는 틀어두고 이야기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을 지키는 환관들은 모두 귀를 못 듣게 만들었답니다.
구중궁궐의 엄격함과 무서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 같았던 모양입니다.
의상 전시실로 먼저 들어갑니다.
왕의 의전용 의상이었다고 하는데
너무도 커 보여 사람 두 셋은 족히 들어갈 듯 합니다.
왕자들이 입었던 복장인 듯...
의상 전시실과 연결되어 있는 보석관으로 들어갑니다.
보석관도 제 4관람실까지 연결되어 있는데요
궁전 입장료 외에 따로 관람료를 받습니다.
보석관으로 들어가니 온갖 찬란한 보석으로 치장된
장식물들이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뽑내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한 푸른색의 터키석을 비롯하여
사파이어, 에머럴드, 루비, 진주, 비취석, 크리스탈, 다이어먼드...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영화로움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황금의 투구와 칼에 푸른 터키석을 많이 장식한 모양이 아름다웠습니다.
투구나 칼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요.ㅎㅎㅎ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어먼드는 영국의 에리자베스 여왕의 왕관에 박힌 것이고
그 다음으로 큰 다이어먼드라고 합니다. 86캐러트
저는 보석에 별로 관심이 없어 대단한 감흥은 못 느낍니다.
그저 아름답다는 것만은 공감하며 한참을 쳐다봅니다.
보석관이 끝나고, 그 다음방은 성물관입니다.
왼쪽은 구약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이슬람 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유리벽 안의 사진을 찍으려니 반사광으로 아주 흐리네요.
몇 안 되는 구약시대의 유물 중에서
세례자 요한의 '팔뼈'와 '머리뼈'가 들어있는 황금의 틀입니다.
역시 구약 시대 유물 중, 다윗의 칼입니다.
이 외에 모세의 지팡이와 모하멧의 발자국 등이 있었는데...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네요.
몰래 찍으려니 다 찍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작은 돌들로 문양을 만든 통로입니다.
섬세하게 반짝이는 모양이 발로 딛고 가기는 아까웠지요.
마지막 네번째 정원으로 들어갑니다.
여기는 왕과 그의 가족들만이 드나드는 좀 사적인 공간이라
특별한 출입문도 따로 없으며 개방적입니다.
이곳은 보스프러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전망이 좋은 정자입니다.
은, 진주, 상아를 상감 기법으로 장식한 건물은 참 우아합니다.
나무가 있는 왼쪽 끝에 금색 지붕을 한 작은 누각이 있는데
사진에 나오지는 않았네요.
여기는 전망대로도 사용되었지만, 라마단 기간에
왕이 낮의 금식 시간이 끝나면 여기서 저녁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왕과 가족들이 식사를 하며, 더러는 차를 마시고 담소를 하며
내려다보는 해협의 풍광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장관이었을 겁니다.
오늘은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이지만
안개낀 듯한 흐린 날도 또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화려하고 특이한 문양의 푸른색 타일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조화를 이룹니다.
터키를 상징하는 푸른색상의 타일들도
그 푸름의 강도에 따라 다양한 색상을 뽐내고 있습니다.
어찌나 이채로운지 눈이 부실 정도였어요.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로 들어오는
빛살 또한 예술적으로 창문을 격상 시킵니다.
이제 다른 출입문을 통해 궁전 바깥으로 나섭니다.
멀리 '블루모스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블루모스크'와 나란히 '성소피아'사원이 자리하는데
우리는 먼저,긴 세월 제자리를 지키며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는
신비로운 사원 성소피아로 들어갑니다.
'아야소피아' 또는 '성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란 뜻입니다.
537년 비잔틴 최고의 걸작으로 완성된 이 성당은
916년간 그리스 정교회의 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하면서 이후로 481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이 됩니다.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1935년부터 지금까지는
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관람되고 있는
사원 건축물로는 최고의 걸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사원 내부로 들어서면 어두컴컴한 공간을
화려하게 부활시켜 놓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정교회로 사용된 창문들을 파괴하지 않고
푸른색으로 코란의 문구들을 새겨넣는 것으로
함께 공존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평화'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끝없이 높은 천정의 돔은 자그마치 높이가 54m나 된다고 합니다.
목이 아프도록 쳐다보면 규모의 거대함에 입이 벌어지고
그 거대한 공간을 구석구석 빈틈없이 아름답게 꾸며놓은 모습에
또 한번 감탄을 저절로 토하게 만듭니다.
그야말로 지상 위에 만든 최고의 천상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습니다.
알고보니 소원을 비는 '땀 흘리는 기둥'의 동판 구멍 때문입니다.
엄지 손가락이 하나 들어갈만큼 구멍이 뚫린 여기에
엄지 손가락을 밀어넣고 한바퀴 돌리면서 소원을 비는 동안
손가락 닿는 곳이 축축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1월 2일 오늘은 토요일이라 여기도 방문객들이 장난이 아닙니다.
줄 설 엄두도 못 내고 지나쳐 갑니다.
지어진 지, 천오백 년 가까운 건물이지만
그렇게 오래되고 이토록 아름다운 사원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였을겁니다. 1204년 제 4차 십자군이 거쳐가면서
보물은 모두 약탈하고, 금으로 된 모자이크화들도 많이 파손되었지만
차마 이 건축물 자체를 파괴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1479년 이슬람교도들에게 장악되면서도
모자이크화 위에 얇은 석회를 덧칠해 덮어버리기는 했어도
이 건축물은 그대로 두고 코란의 문구들을 위에 덧붙이는 형태로
리모델링을 한 채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정교회도 아니고, 이슬람 사원도 아닌
복합적인 사원으로 남아, 지금까지도 많은 방문객들에게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종교적 하이브리드의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칠해진 석회를 제거하는 작업은 아주 오래도록 진행되지 싶습니다.
회칠이 벗겨지는 곳마다 금빛 찬란한 모자이크화들이
제모습을 드러내고 빛을 발합니다.
남녀간의 구분이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서
왕비라고 해도 1층의 공간에서는 남자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으므로
2층의 공간을 여자들 전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노란색 바탕에 아름다운 아라베스크 장식의 돔 천장은 화려하지만
그 내면에 숨겨져 있는 모자이크 성화들은
더욱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이 사원의 기둥은 모두 107개인데
이 중 40개가 본당(아래층)에 나머지는 위층에 위치합니다.
아래 위층을 다 사람들로 채우면 약 4만 명 정도 수용이 가능하다고 하니
그 크기의 규모는 한눈에 들어오기도 어렵고 사진으로 전하기도 어렵습니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9개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운데 황제가 드나들었던 문 위의 만들어진 모자이크화입니다.
석회를 떼어내면서 드러나는 그림이
참으로 정교하고도 정성을 다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그림은 더 이상의 복원이 불가능하다고 하네요.
가운데는 예수님이고 왼쪽에는 성모마리아, 오른쪽엔 천사 가브리엘입니다.
긴 세월을 석회 밑에 묻혀 있었다가 다시 찾은
예수님의 눈동자가 어찌나 또렷하게 나를 쳐다보는 듯 한지...
깊고도 그윽한 눈동자에 매료되어 한참을 마주 보았습니다.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왼쪽에는 비잔틴 콤네노스 2세 황제, 오른쪽에는 왕비 이레인
중앙의 예수님과 왼쪽 콘스탄틴 4세 황제와 오른쪽 죠 여왕.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모자이크화
이 그림은 2층 갤러리 끝에서 1층의 중앙돔을 올려다보며 찍은 것입니다.
1층에서는 실내가 어둡기도 하고 아래쪽에서는 너무 멀기도 해
이렇게 가까이에서 찍기가 어렵지요.
기둥마다 붙어있는 어울리지 않는 이 동판들은
이 사원이 이슬람 사원임을 강조하기 위해
마호멧의 이름과 초대 칼리프(후계자)들의 이름, 코란 구절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나마 기존의 장식들을 파괴하지 않고
덧붙인 걸로 남겨져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이 사원의 모자이크화를 복원하는 사업도 어찌보면
이슬람 종교의 또 다른 훼손일지도 모르는 참 민감한 부분입니다.
원래 모습의 복원조차도 두 종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서로 눈치를 보는 형국이라 느껴집니다.
성소피아 사원을 짓기 위해 제국 각지에서 운반해 온 석재들은 다양합니다.
성당 내의 녹색 기둥은 에페소에 있었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 왔고
붉은 얼룩이 있는 기둥은 바르베크(레바논)에 있는
'아폴론'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네요.
또한 가벼운 자재로 거대한 돔을 만들기 위해
로도스의 섬에서 특별한 타일과 벽돌이 운반되어 왔다고 합니다.
웅장하고도 성스럽고 아름다운 사원을
다시 한번 목이 아프게 쳐다보며 돌아나오는 길~!
어떤 이념으로든, 어떤 종교의 논리로든
파괴하지 않고 공존하는 것은 아름다운 평화이고
그것이 진정한 종교의 궁극이 아닐까를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고
오래 전해오는 문화재들을 파괴하고
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와전되고 굴곡된 모습일 뿐
모든 종교의 원뜻이 아닐거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나옵니다.
나오는 통로에 있는 마지막 성화입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주스티니안 황제가 성소피아를 상징하는 모형을 봉헌하고
오른쪽에는 콘스탄틴 대제가 콘스탄틴 도시의 모형을 들고
각자 그들의 걸작품들을 자랑스럽게 봉헌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누군가에게 바칠 수 있는 마음,
함께 나누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일 겁니다.
오늘의 사진은 너무도 많고
일정이 길어 이스탄불의 1부는 이것으로 일단락합니다.
이스탄불의 2부를 마지막으로 여행기를 마치려 합니다.
너절하고 지루한 여행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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